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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blog.naver.com/hahehi456/222195154019

 

왜 문학을 읽는가? - 문학의 가치와 효용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공부하기 싫을 때면 문학책을 읽었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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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한 책장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공부하기 싫을 때면 문학책을 읽었고, 대학교 와서는 시간이 많아서 한달에 2-3권 정도 여러 작품을 읽었다. 그러다가 취업 준비를 하게 되고,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해서는 문학은 뒤로 한채 재테크, 경제, 경영 관련 책만 열심히 읽고 있다.

더불어 최근 몇년 간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면서, 신간 문학작품이 보기 꺼려지기도 했다. 7년 넘게 매년 읽어왔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등에도 근래에는 페미니즘 관련 작품이 주를 이루게 되어, 오히려 주제의 다양성, 소재의 다양성이 퇴색된 느낌을 받았다.

소외된 다른 이야기들은 어디서 표출되어야 할까.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문학책을 멀리하다, 최근 연휴에 시간이 되어 문학 책을 한권 읽었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7157963

 

너무 시끄러운 고독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대표작. 흐라발 본인이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선언할 만큼 그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며, 필생의 역작이라 불릴 만한 강렬한 소설로 많은

www.aladin.co.kr

오래 읽히는 작품은 이유가 있다. 작품을 읽다보면 책 속의 책처럼 고전의 명문이 간간히 나오는데, 재밌게 읽었던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문학 책을 읽으며, 문학을 읽는 이유에 대해 포스팅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몇년 전에 일기장에 끄적였던 내용인데, 어느 시점에 끄적인지 못찾겠다.

 

왜 문학을 읽는가?

 

1. 문학은 유희다.

문학 작품은 재밌다. 다른 예술 작품처럼 문학 작품에는 스토리가 있다.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들 간의 관계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만들고,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여러 사건을 겪어가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낀다. 예술 작품이 갖는 유희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다른 예술 작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문학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다. 활자로 표현되는 예술 작품이기에 독자의 상상 속 캔버스에서 작품이 완성된다. 이러한 점은 문학의 유희적 요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2. 문학 작품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해준다.

문학 작품에서 다뤄지는 등장 인물들은 잘난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여건 등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더욱 그렇다. 오히려 남들보다 못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주인공인 경우가 대다수다. 현실의 미디어에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인공들은 작품 속에서만큼은 그들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문학 작품 속에서는 현실의 잣대와는 다른 기준으로 등장 인물들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도덕성, 인간성을 기준으로 등장 인물의 좋고 나쁨이 평가된다.​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능력 없다고 평가받는 인물들도 오히려 작품 속에서는 부유하며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보다 탁월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때로는 그러한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은 몰라주지만)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자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문학의 이러한 성격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주고, 독자들이 타인을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예행연습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엘리베이터에 끼인다거나,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체포된다거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일반 사람들이 겪어보기 지극히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이 상황을 대처해가는(어리숙한 주인공의 경우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나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주인공이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대처했으면 더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고실험에 불과하지만,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으며 독자는 자연스레 혹시 나에게도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 대해 예행 연습을 하게 된다. 누가 알까. 나에게도 초능력이 생길지?

문학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기에 이 포스팅을 전문가들이 보면 비웃을 수도 있겠다 ㅎㅎ

사실 내 생각인냥 적어놓은 '문학을 읽는 이유' 속에는 이전에 작품을 통해 알게된 다른 작가들의 생각이 담겨있다. 두번째 이유는 알랭드 보통으로부터, 세번째 이유는 김영하로부터.

4,5년 전 읽었던 책들에 적혀있던 내용들이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잘 기억하고 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인생에 도움도 안되는 문학 작품을 왜 굳이 시간내서 읽어?'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소중한 이유들이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도 변명거리?로 사용할 수 있다면 뿌듯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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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叩頭).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화자인 윤리 선생이 확실한 사과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인,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학생들, 그중에서도 연주에게 가르쳤던 사과의 방식이다.


참 솔직한 소설이다. 위선과 허위로 가득한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주는 소설이다. 제자와 성관계를 갖은, 더군다나 임신시킨 후 책임지지 않은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무척이나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는 화자는 실상 평범한 사람이며, 혹은 평범한 사람들 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뻔뻔한 장애우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타인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화자는 그렇게 부도덕한 인간은 아닌 것이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적 농담을 하고, 외도를 일삼는 동료 선생 무리들보다 그는 확실히 도덕적인 인간이다. 의지할 곳 없는 연주에게도 관심을 가져준 그는 남들보다 오히려 마음씨가 좋다고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역시나 자신을 포장하기 바쁜, 그저그런 인간인 것이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말자는 최소한의 도덕성만 실현하고자 하는 그런 인간이다. 연주와 잠자리를 갖은 후 그는 연주를 걱정하기 보다는 자기자신의 안위에 더 신경썼다. 집 한번 찾아가지 않았고, 진정으로 돌봐주고자 하지 않았다. 연주가 배가 부른 상태로 학교에 찾아와 사랑했고, 죄송했다며 머리를 조아렸을 때, 화자는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까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화자를 비난할 수 있을까?


화자는 청자로서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되는 학생에게 말하고 있다. 그에게 인간이란 완벽하게 선한 존재는 없다고, 그런 척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위선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화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공감이가면서도 단순히 변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최근에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경공모라는 집단으로부터 4천 만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 였다. 고작 4천 만원이었다. 수억, 수십 억원을 꿀꺽 하고도 입을 닫고 있는 정치인들이 수두룩한데, 특활비 명목으로 받은 수천 만원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국회의원이 무수히 많은데, 그는 4천 만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도덕성은 자신의 실수 한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냉정한 사람들 말이다. 물론 화자와 같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포장하려고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겠지만, 도덕적으로 청렴한 사람들 역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고두(叩頭).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단편 소설이다. 좋은 작품이며,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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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당분간 인간 서평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Q. 저자는 등장인물을 알파벳 O, Q로 왜 표현했을까?

 

등장인물의 이름을 알파벳이나 흔한 성(김씨, 이씨)로 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내용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OQ로 표현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일단 형상으로 봤을 때 OQ는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다만 O에서 작대기가 하나 삐죽 튀어나와 Q가 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OQ는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서로 친구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OQ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삐죽 튀어나온 작대기는 바로 성격적 특성을 의미한다. O는 뚜렷하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지 못하며, 타인의 요구를 묵묵히 수용하는 성향이다. 반면 Q는 특출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하나의 성격적 특성이 사회 속에서는 큰 차이를 빚어냈다. Q는 무난한 삶을 살고 있는 반면, O는 부적응자, 능력 없는 자로 비쳐지게 되어 사회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같은 관점인데, 다른 분석을 적용해볼 수도 있다. O는 남들이 굴리면 한없이 굴러갈 수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Q의 경우 남들이 굴려도 어느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뾰족 튀어나온 점이 한없이 굴러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구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O의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기에 남들이 원하는 요구에 무조건 수용하게 되어있다. 반면 Q의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존재하기에 자신의 수용범위를 넘어선다면 거절할 줄 안다.

 

 

Q. O가 피부가 쩍적 갈라지는 것과 선임자가 젤리처럼 물렁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간다. 특히 직장에서 그러한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다수의 현대인들은 직장에서 상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상처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타인에게 정신적인 위해를 입힌 가해자들은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O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것, 그리고 선임자가 갈수록 물렁물렁해지는 것은 그들이 받은 정신적 피해를 표면화한 것이다. O와 선임자는 그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될수록 즉각적으로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 바라보며 독자들은 자연스레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 간에 많은 정신적 피해를 주고받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한편 O의 경우 피부가 갈라지면서 부스러기가 생긴다. 부스러기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다. Q 역시 O가 자신의 집에 지내면서 이곳저곳 부스러기를 떨어트려놓아 이에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부스러기는 O가 받은 정신적 피해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OQ가 대화하는 도중에도 Q가 감정적 상처를 입는 순간 부스러기가 생긴다. 하지만 Q는 부스러기에만 주목하지, 어떠한 이유로 부스러기가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신이 준 감정적 상처에는 주목하지 않은 채, 피해자에게만 문제를 전가하는 사회상을 보여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집단에 속해 생활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단에는 성격적으로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타인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람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며 비난한다. 그들의 왜곡된 성향이 우리에게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해보지 않는다. 부스러기로 인해 O가 더 싫어지듯,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행동 때문에 그 사람을 더 싫어하게 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근원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Q. 작품의 제목, 당분간 인간의 의미는?

 

당분간 인간이라는 의미는 그 짧은 순간 이외에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이는 인간을 인격을 지닌 개체로 대접하기보다는 생산 도구로서 취급하는 사회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 사람의 인격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이익을 창출하는 데 유용한 인간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사람이 착해도 능력이 없으면 선임자와 같이 단순히 물러터진 인간이며, 인격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뛰어난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작품의 제목인 당분간 인간은 이러한 사회상을 콕 집어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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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모리슨 호텔 서평





  먼저, 작가를 통해 작품을 바라본다면, <모리슨 호텔>에서도 김경욱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김경욱의 작품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김경욱의 작품에는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느낌(뉴욕보다는 베를린 같은)이 묻어난다. 작품의 배경 자체가 도시가 되는 경우가 많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 중에도 도시적인 것이 많다. 영화관이라든가, 펍이라든가, 자동차라든가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여러 번 등장한다. <모리슨 호텔>의 경우에도 배경은 도시이며, 주인공들의 직업 역시 레코드 가게 주인, 비디오 가게 알바생, 인물 포토그래퍼와 같이 도시적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는 도시이기 보다는 한적한 동네 느낌에 더 가깝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자연과는 동떨어져 있다. 주인공은 주로 남자인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사회적이기 보다는 은둔적인, 그러하더라도 전자기기를 이용한 다른 형태(PC통신이라든가, 싸이월드라든가)로 사람들과 스스로를 연결해보려는 존재인 경우가 많다. 특징적인 것은 - 여러 작품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 주인공들이 대체로 영화나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이 제시될 때도 있으니,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감수성이 풍부하다고도 볼 수 있고, 오타쿠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들은 주로 김경욱(71년생)10, 20대를 지낸 시기인 8-90년대 홍콩 영화 조예가 깊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홍콩 영화에 대해 언급이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도 작품 곳곳에 홍콩 영화가 등장한다. ‘아성은 오우삼 감독이 만든 영화를 좋아하기에 주구장창 카운터에서 그의 영화만 돌려보고 있고, ‘운하마리<아비정전>에 나오는 대사를 공유한다. ‘마리당신과 나는 199373일 오후 여덟 시 20분부터 21분까지 1분 동안 함께 있었어요. 우린 이 1분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 거예요.” 말하면, ‘운하“<아비정전>이로군요.”라 대답한다. 마치 <베티를 만나러 가다>에서 남녀 주인공이 PC통신 채팅방을 통해 영화 대사를 주고 받은 것처럼 말이다.

 

구조를 살펴보자면 작품은 세 챕터로 나뉘고, 모든 챕터는 화자를 서로 다르게 하며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 첫 챕터의 화자는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운하이고, 둘째는 비디오 가게 알바생인 아성’, 셋째는 본명이 말희인 포토그래퍼 마리이다. 구조상 특징적인 점은 각 챕터의 시작 부분에 영화의 대사가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제시된 영화를 보았다면 작가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대사의 내용만 보아도 대사들이 각 챕터의 서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각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그게 만일 나라면 난 구름이 검다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첫 챕터에 나오는 <퐁네프의 연인들> 속 대사는 운하마리의 사랑을

 

너의 입술은 내 귀에 가만히 속삭였어. “내 눈동자 속에 노랗고 작은 달이 뜨는 건 나의 절정을 말하는 거야라고 네 눈을 보았어. 잠시 후 난 노랗고 작은 달이 떠오르는 걸 보았고 꿈에서 깨어났어.’

두 번째 챕터에 나오는 <나쁜 피> 속 대사는 아성은미의 사랑을

 

정말 우습지 낯선 곳에 왔는데 모든 게 똑같으니 말야

세 번째 챕터에 나오는 <천국보다 낯선> 속 대사는 지환의 자살을 연상시킨다.

 

  한편, 이 작품은 수미 상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챕터는 운하마리의 서사가 주를 이루고, 두 번째 챕터는 마리가 스치듯 등장하긴 하지만 아성은미의 서사가 주를 이룬다. 때문에 첫 챕터를 마치고 난 후에 운하마리의 이야기는 두 번째 챕터를 읽으며 머릿속에서 잠시 희미해졌다가 세 번째 챕터에서 다시금 떠오르게 되는데, 이때 그 둘이 함께 등장했던 장면의 의미가 더 깊어진다. 마치 시구에서 첫 연과 끝 연에 같은 내용의 구절을 반복하면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다음으로는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브제(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에 주목해보겠다. ‘운하의 시점을 취하고 있는 첫 챕터에서 파리운하의 일생에서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등장한다. 그리고 파리를 마주치는 시점마다 운하는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운하가 처음 파리를 마주쳤을 때는 이윽고 교통 사고가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두 번째 파리를 마주쳤을 때는 마리운하의 아이를 낙태한 사실을 알게 된 바로 이후이다. 마지막으로 운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파리를(맡은 편에서 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이기도 하다) 맞이하게 된다. 특이하게 이 작품에서는 파리떼도 아니고 파리가 죽음의 이미지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죽는 것을 빗대 파리 목숨이라 하지만, 교통 사고 또는 자살로 한 순간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파리는 운하의 분신이기도 하다. ‘마리운하의 인생에서 사라진 후, 불안하고 답답한 운하의 마음을 대변하듯 파리가 유리창 사이에 껴서 방황하는 모습이 제시된다. 또한 운하역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전생에 파리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며, 파리와 같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첫 챕터의 제목이 파리의 우울이고 챕터의 시작 부분에 <퐁네프의 연인들>의 대사가 적혀 있기에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는 프랑스 파리의 이미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의 우울의 파리는 곤충 파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프랑스 파리랑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후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의 유명한 시집 제목이기도 하며, 퇴폐적이고, 타락한 파리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부모를 여읜 이후 방황하며,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삶을 산운하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파리는 도시와 곤충 모두 뜻하는 바가 있던 것이다.

챕터의 제목에 대해 언급했으니, 제목과 관련해 다른 부분도 살펴보겠다. 작품의 제목인 모리슨 호텔은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는 아성은미가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록 카페이며,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날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모리슨 호텔은 도어즈라는 록 그룹의 앨범 타이틀이다. 그 앨범의 재킷에는 하드록 카페 앞에서 서성이는 노인들이 비춰지고 있다. 작가는 작품을 끝맺으며 만일 록이 하나의 음악장르이기 이전에 특별한 인간정신을 상징한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오늘도 나의 발길은 모리슨 호텔을 향하고 있다.’라 적고있다. 작가는 사랑하고, 고뇌하며, 쉽사리 열정에 휩싸여버리는 역동적인 젊은이의 모습과 그 정신을 모리슨 호텔로서 이미지화한 것이다. 백발의 노인이라도 그 마음 속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모리슨 호텔은 그에게 항상 문을 열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은미를 허무하게 잃고 만 아성에게 모리슨 호텔은 문을 굳게 닫아놓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젊더라도 말이다. 작품 속에서 모리슨 호텔이 후에 갤러리로 바뀌게 된 것은 아성이 은미의 죽음 이후 전과 같은 열정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챕터의 제목은 중독된 슬픔이다. 슬픔이 중독될 수 있나?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그럴 수 있다고 끄덕인다. ‘마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면서 삶에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은 슬픔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사라지지 않고 마리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마리는 이후 완벽할 수 없었고,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그의 약혼자 인서와 결국 파혼할 수밖에 없었다. 슬픔이 쉽게 떨쳐지지 않은 것이다. 더불어 지환 역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이 가져온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택했다. 이 역시 슬픔에 중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음악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이다. 등장인물들이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항상 음악이 함께 한다. ‘운하가 부모를 여의게 된 교통 사고가 일어나기 전 차안에서는 비틀즈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은미는 성관계를 맺을 때 꼭 짐 모리슨의 ‘Light my fire’을 듣는다. 이외에도 지환이 자살하기 전 은미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빌리 할리데이의 노래가 흘러나왔으며, ‘아성이 등장하는 장면 장면마다 짐 모리슨의 앨범이 재생되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좋아하고, 자주 듣는 노래는 서로 다르지만, 그 노래 대부분은 20세기 후반의 서양 음악이며, 그 중에서도 주로 밴드 음악이다. 이런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음악은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자, 그 장면의 분위기를 연출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가 역시 작가의 말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내가 그 시대의 정서를 모르고, 각 음악이 풍기는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분석은 못하겠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자마다 다른 답을 내놓겠지만, 작품에는 세번이나 반복되는 부분이 있고, 이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운하의 아버지의 대사는 작품 통틀어 세 번이나 등장한다 (책 제목 바로 뒷장에도 이 구절이 적혀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네 번이라 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입을 통해, 운하의 생각 속에서, 마리의 생각 속에서 말이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FM 음악프로와 같은 것이란다. 정해진 시간 동안 늘 자신의 귀에 맞는 노래만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신이 싫어하는 노래도 꾹 참고 들어야 하는 법이야. 그것은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이지.” 좋은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힘든 날도 참고 기다려야 된다는 이야기다. 이 구절 대로라면 주인공들은 힘든 날을 참고 견뎌내서, 좋은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운하마리가 남겨놓은 공허함에 술에 진탕 취해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삶은 마감했고, 이유 모를 우울에 휩싸여 있던 은미는 목욕탕에서 팔을 그어 자살했다. ‘마리의 첫 사랑이던 지환도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워하며 베란다에 뛰어내리는 선택을 하고 만다. 더욱 비극인 것은 마리는 아버지의 상()을 치르기 위해 호주에서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고, ‘운하와 재회하게 될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막상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의 비보에 더하여 운하의 비보를 접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운하가 죽은 후에 독백하듯 FM에는 재방송이 없다(기술의 발달로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고 하면 왠지 서글플 것이다). 이미 흘러가버린 노래는 아쉬워해야만 할 뿐 다시 들을 수 없다. 지나간 인연, 놓쳐버린 기회, 저질러버린 실수들은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더 좋은 노래가 나오기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라디오를 꺼버리는 순간. FM은 영영 나오지 않아 버린다. 좋은 노래든 나쁜 노래든 들을 길이 없고, 우리의 인생에서 꺼진 라디오는 다시 켜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영혼이 된 운하는 스스로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담담하게 읊조리지만, ‘마리가 곧 한국에 도착해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해도 미련이 없을까? 작품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삶의 의미 아닐까. 비극적으로 보이는 삶도, 그다지 비극이 아니며, 불행 앞에서 삶을 단념하는 것이 스스로를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전하려 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앞에 언급한 모리슨 호텔의 뜻하는 바와 종합해보면,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을 테지만, 쉽게 좌절하지 말고, 너의 젊은 열정을 평생 잊어버리지 마라’, 이것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한편 작품을 읽다 문득 생각난 부분이긴 한데, 세번째 챕터에 나오는 마리의 이야기는 그 속에서 운하와의 이야기만 소거한다면, 요새 많이 출시되는 페미니즘 단편 소설 중 하나라고 소개해도 모를 것 같다. 20년 전에 쓴 소설이지만 <현남 오빠에게> 소설집에 들어와 있어도 위화감이 없겠다. 작품에서 비판적으로 드러나는 관습적인 성역할 분리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이 20년이 흐른 후 한국 사회에서 이슈화가 된 것을 볼 때, 한국 사회는 무척이나 더디게 발전했다고 느껴진다.

 

  이만 비평(?)을 마친다. 역량 부족으로 인해 놓친 부분도 많고, 근시안적인 비평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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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비평 - 채식주의, 영혜의 꿈, 동박새




개인적으로 한강이라는 작가를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 접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이었죠. 때문에 맨부커 상을 받아 작가가 유명세를 타게 될 무렵, 살짝 속으로 뿌듯함(내 안목이 괜찮았구나 하는 생각?)과 아쉬움(아끼는 작가를 남들에게 잃어버린 느낌? ㅋㅋ)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채식주의자' 연작집도 맨부커 상 받기 이전부터 읽었었는데, 18년도에 학교 문학 교양 수업에서 다루게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며 읽고, 똑같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하니까 작품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하게 된 듯 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문학이 묘미니까요 ㅋㅋ 다음은 '채식주의자' 연작 중 '채식주의자' 부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채식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이와 관련하여 영혜의 꿈과 영혜의 손에 죽어있는 동박새는 무엇을 뜻하는가?



영혜의 채식주의는 그녀가 일생 동안 노출되어왔던 폭력과 억압에 대한 거부이며, 자신에게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성찰 및 억제이다.

 

 논의에 앞서 육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식은 동물의 희생을 수반한다. 때문에 육식에는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한다. 육식을 하는 사람은 가해자이며, 그 과정에서 도축되는 동물은 피해자이다. 동물은 인간과 같이 몸에 피가 흐르는 생명체이다. 도축의 과정에서 동물은 죽임을 당하고, 이후 형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갈갈이 해체된다. 이 과정에서 동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붉은 피를 쉼없이 뿜어낸다. 즉 육식에는 한 개체의 일방적인 희생이 전제되며, 이는 상대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상징한다.

 

영혜는 줄곧 폭력과 억압에 노출되어왔다. 어렸을 때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혜는 커서도 가부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남편과 결혼하게 된다. (남편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그가 아내의 역할을 규정짓는 모습, 그러한 아내상에 영혜가 알맞다고 생각해 결혼했다는 점, 그리고 아내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원하는 장면 등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가족 구성원으로 둔 영혜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 혹은 아내의 이미지와 그에 걸맞은 규범으로부터 일생동안 스스로를 옥죄여왔다. 이는 실상 개인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인 폭력이며, 요새 이슈가 되는 젠더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혜의 채식주의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이며, 육식이 표상하는 폭력과 억압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적 규범, 관습 역시 영혜에게는 폭력과 억압의 일종이다. 영혜는 아주 평범한 여자이다. 하지만 실상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평범이라는 것의 규정도 남편과 같은 타인의 눈에서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영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들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영혜는 자신이 원해서 주변 환경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현상을 좇을 따름이다. 그만큼 그녀는 나약한 개인이다. 이런 영혜에게 채식주의는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단순히 비정상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그녀의 채식주의는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인 것이다.

 

  한편 채식주의는 영혜 자신에게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성찰 및 억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꿈과 동박새의 의미를 다룰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영혜가 아버지나 남편으로부터 당해온 직간접적인 폭력과 억압이 영혜 내부에 폭력성이 깃들도록 만들었고, 이 폭력성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을 보여주는 오브제이다. 영혜의 꿈에선 살육과 피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영혜가 어떤 동물을 죽이거나, 어떤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영혜를 죽이는 것과 같은 내용이 꿈 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영혜는 일상생활 속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한 생각을 의식적으로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당해온 폭력과 억압은 영혜 안에 폭력성으로 내재되어 버렸다. 이 폭력성이 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있다가, 꿈이라는 무의식의 공간을 만나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는 죽어 있는 동박새를 통해 다시금 확인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의 손 안에는 작은 동박새가 있었는데, 이는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1]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영혜에게 물어뜯겨 죽은 것이다. 당시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다 칼부림 소동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즉 정신이 이전보다 온전하지 못했다. 채식주의자가 생명체를 물어뜯어 죽인다는 것은 의식적인 행동이라 볼 수 없다. 때문에 이러한 영혜의 행동 역시 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던 폭력성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1] 채식주의자,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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